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좌부 불교 (문단 편집) == 특징 == 상좌부 불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가능한 한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하므로 보수적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석가모니의 가르침 이상의 길은 없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말씀하신 길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삼법인]], [[사성제]], [[인연]]의 가르침, [[팔정도]]와 깨달음을 이루어 해탈하기 위한 [[사마타]]와 [[위빠사나]] 명상이라고 하는 수행 방법이다. 석가모니는 해탈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집착을 없애고 번뇌를 소멸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수행을 통해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면 [[아라한]](나한)이 된다. "붓다(부처)"는 [[석가모니]]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아 깨달음을 얻은 인물을 의미하는 경우는 아라한 등 다른 호칭을 사용한다. 깨달음을 얻은 인물을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대승 불교, 금강승 불교에서만 해당한다. 상좌부 불교의 장로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게, 다만 열심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가는 것에 자신의 모든 책임을 두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자신의 해석을 더하는 것을 일절 거부한다. 그리고 [[팔리어]] 경전에 기록된 부처님의 길로부터 벗어나지 않게 사는 것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긴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당시에도 그러한 장로들의 태도가 보수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승 불교와 핵심적인 교리는 차이가 없지만, 수행법이나 사상면에서 차이가 있다. 또 세세한 계율과 그 해석에도 차이가 있다. 예컨대 [[육식]]을 금하지 않고 허용한다. [[대승 불교]]와 비교하여 상좌부 불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 상좌부 불교에서는 [[팔리어]]로 된 경([[니까야]]),율(위나야),론(아비담마) 삼장만을 경전으로 여기며 이것이 부처님의 본래 말씀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본다. 대승 경전[* [[반야심경]], [[금강경]], [[천수경]], [[법화경]] 등]은 후대에서 대승 불교의 교리를 합리화 하기 위해 만든 경전이라고 봐서 인정하지 않는다. 대승 불교에서는 대승 경전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직설은 아니지만 진설이라고 본다. * 계율을 중시하고, 다른 종교 및 다른 문화의 형태를 혼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이게 항상 100%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 * 대승 불교에서와 달리 [[승려|스님]]들이 직접 농사를 짓거나 음식을 만들어 먹지 않기 때문에 [[사찰 음식]]이라는 개념이 없다. 승려들은 계율에 따라 음식을 별도로 만들어 먹지 않고 탁발 또는 공양청으로 재가자들로부터 얻어먹는다. 요리를 직접 해먹게 되면 본인이 좋아하는 음식과 맛을 추구하고 집착하게 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고 음식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육식]]을 허용하는 이유도 사람들이 주는 대로 먹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음식을 저장하거나 해먹는 것은 계율에서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 [[부처님오신날]]이 음력 4월 15일이다. 세부적인 교리를 보면 상좌부 불교와 대승 불교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고 볼 수도 있으며, 티벳이나 일본의 금강승(밀교)과 비교하면 차이가 더 커진다. 대승 불교와 대조해 보면, 상좌부 불교는 적어도 다음 9가지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 * '''1. 깨달은 자는 다시 태어나는가?''' * 상좌부 불교: 깨달은 자인 아라한과 부처님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궁극의 깨달음을 이룬 자는 다시 태어남이 없다. * 대승 불교: 깨달은 자는 자유로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선사들은 깨닫고 나서 자유로이 다시 태어남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으며, 티벳불교는 더 나아가 일부 법맥의 깨달은 스승은 다시 태어나 깨달음의 맥을 잇는다는 주장을 한다. * '''2. 깨달음과 열반(팔리어로 닙바나,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은 무엇인가?''' * 상좌부 불교: 성위4과(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가 깨달음이고, 각 과는 위빠사나의 16단계 지혜를 통해 닙바나([[열반]])를 체험해야만 일어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제대로 깨달음은 아라한과뿐이다. 석존(석가모니 부처님)께선 자신이 아라한과를 얻기 전까지는 '깨달았다.'고 하지 않으셨음을 초전법륜에서 5비구에게 강조하셨다. * 대승 불교: 탐진치 3독의 소멸을 열반으로 보는 데선 상좌부 불교와 같다.[* 조계종 불광사 불광미디어 [[http://m.bulkw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403|링크]].]그러나 보살사상을 강조하는 대승에선 화엄경에 기초해 아라한과보다 보살 10지를 넘어서 구경각을 이루라고 강조한다. 이 과정과 결과에 있어 선종은 돈오점수, 점수돈오, 돈오돈수 등 다양한 주장과 학설이 있다. 보살사상의 영향으로 열반 자체보다 계속 다시 태어나 중생교화하는 보살도가 아라한보다 뛰어난 경지라고 본다.[* 대승에 대한 오해로 상좌부의 아라한과를 부정한다는 것이 있다. 그러나 상좌부의 아라한과를 낮추어 보긴 해도 부정하진 않는다. 만일 부정한다면 대승 불교에서 나한(아라한)을 공경하는 나한 신앙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3. 부처와 보살(팔리어로 보디삳따, 산스크리트어로 보디삳바)은 무엇인가? ''' * 상좌부 불교: 아라한도 깨달은 이이고 부처님도 깨달은 이이지만 두 존재는 다른 점이 있다. 이 세상에 아라한은 많을 수 있지만, 새로이 불법을 펴는 정등각자(正等覺者) 부처님은 우주에서 오직 한 시대에 한 분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인류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공겁(空劫) 시대도 있다. 보디삳따[보살]는 이러한 부처님이 아라한과를 얻기 전에 바라밀을 닦는 수행자일 때의 이름이다. 따라서 보디삳따는 반야심경에서처럼 깨달음의 설법을 하지 않는다. 또한 4아승기 십만 대겁 동안 바라밀을 닦아야 하므로 부처님에게 깨달음의 설법을 듣고 한 생에 깨닫는 일도 없다. 보디삳따는 공겁을 지나 스스로 닙바나를 체험하고 아라한과의 깨달음을 스스로 이루어 부처가 되어 잊혀진 불법을 새로이 펴야 한다. 따라서 보디삳따가 설법하거나 부처님께 깨달음의 법을 듣는다고 하는 경전은 다 위경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http://cafe.daum.net/vipassana/5nU/679|#]] * 대승 불교: 부처는 ‘깨달은 이’라는 뜻이다. 모든 존재가 궁극적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 보디삳바[보살]란 단어는 다양한 뜻으로 쓰이고, 모든 수행자를 총칭하는 이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공간적으로 여러 부처가 존재할 수는 있어도 한 세상에 동시에 여러 부처가 나올 수는 없으며, 모든 부처는 저마다의 정토가 있다.[[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89XX76000068|#]] [* [[정토종]] 항목의 주석도 참조하면 좋다.] [[아함경]]에도 목련존자가 기광여래라는 부처가 있는 세계로 가서 기광여래를 만나고 기광여래의 제자들을 데려온 일화가 있다. <증일아함경> 29권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sanga_zavi&logNo=10019111566&proxyReferer=https%3A%2F%2Fm.search.naver.com%2Fsearch.naver%3Fie%3DUTF-8%26query%3D%25EA%25B8%25B0%25EA%25B4%2591%25EC%2597%25AC%25EB%259E%2598%26sm%3Dand_hty%26where%3Dm|참조]] * '''4. 핵심교리가 4성제 8정도인가? 3법인, 4법인인가?''' * 상좌부 불교: 석존께서 친히 하신 말씀에 따라 4성제 8정도가 있는 것이 불교다. 8정도에는 스님이라면 계율이 포함된다. 스님은 아플 때가 아니면 오후에는 음료수 외 음식을 먹지 않고, 대처(帶妻)를 하지 않는 등 구체적인 계율을 지키는 것이 불교다. 4성제와 8정도를 부차적인 것으로 보거나 다른 교리를 핵심교리라고 내세워, 스님들이 계율을 지키지 않는 종교는 불교가 아니다. * 대승 불교: 대승 반야심경의 '무고집멸도'를 4성제의 부정이라고 알고 있으나, 대승에서 무/공은 상주불멸하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지 현상으로서의 존재의 부정이 아니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대승 불교에서도 인정되는 가장 기본적인 불교 교리다.[* 참조: <불교 입문>-대한불교조계종 출판부, <도표로 보는 불교 입문>-민족사.] * '''5. 공즉시색(空卽是色)인가? ''' * 상좌부 불교: 아니다. 공(空)(무아無我)인 것은 물질, 마음, 마음부수, 닙바나로 실제로 있는 것 네 가지 전부이다. 그러므로 공은 물질에 한정되지 않는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은 논리적으로 맞으나 공즉시색(空卽是色)은 논리적 오류다. * 대승 불교: 그렇다고 본다. 모든 물질(색)은 물론 법도 그 성질은 공하다고 본다. 중관학파의 윤회즉열반이란 표현도 이에 기초하는 것으로, 윤회도 실체가 없기에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http://m.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6138615|참조]] 참고로 위의 상좌부 불교 주장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오류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색'과 '색의 공'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뜻이지 공이 색에 한정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다음 구절인 "수상행식 역부여시(수상행식도 역시 이와 같다)"를 보면 더욱 의미가 명확해진다. 오온 중 나머지 수,상,행,식도 색과 마찬가지로 "수즉시공 공즉시수", "상즉시공 공즉시상", "행즉시공 공즉시행", "식즉시공 공즉시식"인 것이다. 이처럼 반야심경에서는 오온과 오온의 공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주제를 설하고 있으며, 이는 곧 "오온은 공(空)=무자성(無自性)=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다"는 법무아(法無我)를 뜻한다. *''' 6. 6식(六識)은 동시생멸인가? ''' * 상좌 불교: 니까야에 적힌 석가모니 부처님 설법에 기초해 말룬꺄뿓따경(Malunkyaputta Sutta)과 바아히야경(Bāhiya Sutta)에서 석존께선, 볼 때 보는 것만 있고, 들을 때 듣는 것만 있다고 하셨다.[* What the Buddha taught(Gordon Fraser)의 24쪽에서, 마치 영혼처럼 똑같은 식(識)이 보고 듣고 느끼고 인과의 결과를 받으며 윤회한다고 믿는 사아띠(Sāti)에게, 석존께서는 ‘이 어리석은 사람아’라고 석존께서 줄 수 있는 최대의 면박을 주며, ‘내가 식(識)이 조건 때문이 일어난다고, 다시 말해 조건 없이는 식(識)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눈과 보이는 것을 조건으로 식(識)이 일어나면 안식(眼識)이라 불리고, 귀와 들리는 것을 조건으로 식(識)이 일어나면 이식(耳識)이라 불리고,.... 마음과 마음 대상을 조건으로 식(識)이 일어나면 의식(意識)이라 불린다’(Mahātaṇhāsaṃkhya-sutta, Majjhima-nikāya I (PTS ed.), p. 256 ff)고 분명히 설파하신다. 즉 똑같은 불변의 식(識)이 눈으로 보면 안식(眼識)이 되고, 귀로 들으면 이식(耳識)이 되고...마음 자체 내의 대상을 알면 의식(意識)이 되는 것이 아니다. 촛불의 불꽃이 일정량의 연료와 산소를 조건으로 하나의 불꽃이 일어나 사라지고, 그 다음 연료와 그 다음 산소를 조건으로 다음 불꽃이 일어나 사라지는데, 앞의 불꽃과 뒤의 불꽃은 서로 다른 연료와 산소를 조건으로 한 서로 다른 불꽃이며, 앞 불꽃과 뒤의 불꽃이 만난 적도 없듯이, 안식(眼識) 일어나 사라지고, 이식(耳識)이 일어나 사라지지만, 안식과 이식이 동시에 존재하거나 동시에 생멸한 적이 없다. 한 번에 육식 중 한 식(識)만 생멸하며, 여러 개의 식(識)이 동시에 생멸하거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위빠사나의 고차원적인 지혜를 통해서 안식(眼識)이 일어나 사라지고, 그 다음에 의식(意識)이 일어나 사라지고, 그 다음에 이식(耳識)이 일어나 사라지고... 하는 식으로 한번에 6식 중 한 식(識)만 생멸함을 직접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잘 믿기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http://cafe.daum.net/vipassana/5nU/643|관념 해체&볼 때 보는 것만 있다]][[http://cafe.daum.net/vipassana/5nV/296|오문인식과정]][[http://cafe.daum.net/vipassana/5nV/297|의문인식과정]]. 위빠사나의 지혜로 바로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관념을 거친 앎으로써는 그 논리적 가능성만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 대승 불교: 동시생멸을 주장하는 대승 불교 지도자도 있다. *''' 7. 오온(五蘊)은 차례로 일어나는가?''' * 상좌부 불교: 초기불교에서는 오온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해서 말할 필요조차 없다(《초기불교입문》(초기불전연구원): 72). * 대승불교: 티벳밀교의 한 종파에서는 오온이 순차적으로 일어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한국에선 대체적으로 오온이 동시발생이라고 보는듯하다. * '''8. 6식(六識)인가? 8식(八識)인가? 10식(十識)인가?''' * 상좌부 불교: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은 6식(六識) 안에 있다. 논서에선 결생식, 재생연결식, 바왕가(잠재의식)등이 언급되는데, 눈과 연결되어 안식(眼識), 귀와 연결되어 이식(耳識)이듯이, 다 특수한 조건하에서의 의식(意識)을 말하는 것인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논란이 있다. * 대승 불교: 6식설 외에도 유식설에서 말나식과 아뢰야식을 더해 8식(八識)설도 인정한다.[[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559833&cid=46648&categoryId=46648|#]] 구유식파의 9식설 등도 있으나 신유식파의 8식설이 정론으로 통한다. * '''9. [[위빠사나]], 사마타 vs. 비빠샤나, 샤마타''' * 상좌부 불교: 팔리어 사마타(samatha)에서 sama는 고요함, 평정, 평화의 의미고 tha는 '지키다, 머물다, 어떤 상태로 남겨지다'는 뜻에서 나왔다. 팔리어의 사마타는 표상(니미따nimitta)[* 빠리깜마 니밋따, 욱가하 니밋따, 빠띠바가 니밋따가 있다.]를 대상으로 하여 표상에 집중하여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이다[* 초기불교입문 (초기불전연구원): 193]. 팔리어 위빠사나 (vipassanā)는 있는 그대로 본다, 즉 현상을 현상 자체로서 본다, 혹은 관념으로 조립한 전체상과 부분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있는 그대로 해체하여 본다는 의미이다[* 초기불교입문 (초기불전연구원): 40-43. 위빠사나(vipassanā)는 경전에서는 “현재 일어나는 현상들을 바로 거기서(Each presently arisen state) 통찰한다(vipassati)”(131Bhaddekaratta Sutta~134경Lomasakangiyabhaddekaratta Sutta, Majjhima-Nikāya; The Middle Length Discourse of the Buddha(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95): 1039; 아비담마 길라잡이 2(초기불전 연구원 2017): 272)에서 위빳사띠(vipassati)라는 동사로 등장한다. vi-는 ‘분리해서, 해체해서,’ passati는 ‘보이는 그대로 본다(sees), 못 본 것을 발견한다(find), 알아차린다(understands)’의 뜻이 있다. 문맥과 어원으로 볼 때 위빳사나는 현재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현상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을, 조립된 관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관념으로 조립되기 이전에 원래의 해체된 상태 바로 거기서 나타나는 그대로(as and when it comes), 알아차림이다. 현재의 현상을 관념으로 조립해서 이해하지 않고, 현재의 현상이 나타나는 그대로, 현재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바로 거기서, (관념으로 조립하고 구성하는 시간 지체나 왜곡 없이) 바로 알아차림에 위빳사나 수행의 핵심이 있다.]([[http://cafe.daum.net/mahasi/8DP1/49|행선과 좌선 참조]][[http://cafe.daum.net/vipassana/5nU/643|관념 해체]][[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995752&cid=41893&categoryId=41894|#]]). 구체적으로 팔리어의 위빳사나는 나타나는 몸과 마음의 현상의 생멸을 나타나는 그대로 알아차려 무상・고・무아를 아는 등 16단계 지혜를 차례로 밟아나가 닙바나를 체험하는 수행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 (도서출판 불방일): 60-122]. * 대승 불교: 북방 대승에서 산스크리트어 샤마타는 지(止, 멈춤)나 적정(寂靜)으로 번역되고, 산스크리트어 비빠샤나는 관(觀) 또는 비발사나(毘鉢舍那)등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비빠샤나와 샤마타 수행은 북방 대승의 선종에선 하근기로 폄하되어왔으나, 실제로는 대승 불교에서도 선종 등장 이전까지는 이 지관 수행법이 표준 수행법이었고, 정혜쌍수와 더불어 선종에서도 관심법의 기초로 내려왔으며[[http://m.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3505|#]], 이를 잘 보여주는 책이 바로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3434452&cid=40942&categoryId=35104|선종영가집]]이다. 또한 지관(샤마타 비빠샤나 수행) 수행법을 다루는 중국의 천태지의의 저서 <[[https://m.terms.naver.com/list.nhn?cid=41893&categoryId=41907&so=st4.asc|마하지관]]>과 이를 요약한 <천태소지관>은 선종의 수련서 <좌선의>의 기반이 되었다. 한국의 초의선사도 지관법을 수련한 승려 중 대표적 인물이다.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2&cp_code=cp0528&index_id=cp05280180&content_id=cp052801800001&print=Y|#]] 헌데 왜 선종에선 많은 승려들이 이를 폄하해왔는가 하면, 선종이 이러한 지관 수행법에 대한 대안으로서 새로운 수행법을 제시한 역사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며, 한국 선종의 경우 그 중에서도 [[간화선]] 중심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에 대한 근대적 연구가 진전되고 남방불교, 티벳불교 등의 전통들이 유입되면서 한국 불교계도 특정 수행법만을 절대화하지 않는 추세이기는 하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승려들이 [[탁발]]로만 생활을 한다고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탁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사찰 근처에 깟삐야꿋띠[* kappiyakuti 혹은 kappiya-kuti, 정주淨廚로 번역한다]를 마련해 음식을 조리하고 깟삐야부미[* 한자로는 정지淨地. 범어로는 kappiya-bhumi.]를 두어 음식을 저장한다. 이는 원래는 금지하던 것이었으나 현실적으로 완전 [[탁발]]로는 승단 운영이 불가능하니 생겨났다. 석가모니도 기근이 들자 승려들이 직접 음식을 해먹는 것을 허락했다. 이러한 것들은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387|정법]][* 한자로는 淨法, 범어로는 깟빠kappa]이라 하여, [[석가모니]] 당대부터 현실에 맞게 예외조항을 둔 것이다. 계율 역시 석가모니 당대에부터 시대와 상황에 맞게 계속 변해 왔다([[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9311|참조]]). 그러나 승려가 직접 해먹는 것은 기근이라는 불가피한 상황 때문이고 기본적으로는 사찰에 존재하는 정주와 정지를 쓴다하더라도 재가자들이 와서 요리를 한 뒤 승려들에게 공양하는 방식이라서 승려들이 직접 요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는대로 먹는 것은 동일하며 이것이 계율 위반은 아니다. [[한국]]처럼 현대화된 국가에서는 탁발로 매일 생활한다는 건 더더욱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한국테라와다불교 교단에서도 탁발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 날을 정해 시행하고 평소에는 재가자가 선원내에서 조리하여 공양하는 식으로 한다.[* 그렇다고해서 길거리 돌아다니며 아무에게나 달라고 하는 건 아니고 해당 선원에 다니는 신도들과 거리에서 모여서 그들이 탁발을 하는 형태다.][* 현대 동남아 상좌부 불교권에선 탁발과 운동 부족으로 비만 승려들이 늘어나 사회문제가 되었다.[[http://www.newsis.com/view/?id=NISX20181226_0000513549|#]] 요약하면 맛있는 것을 먹고 한 끼에 폭식하며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 비만에 걸리가 딱 좋은 환경이다. 예전에는 재가 신도들 경제 형편이 좋지 않아 보시하는 음식도 별로 좋지 않았지만, 형편이 좋아지자 좋은 음식을 보시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승려들도 그런 것을 먹고 비만이 되었다는 것. 게다가 육식도 가리지 않으니 비만 문제가 더 심하다.] 또다른 특징은 최근까지 오랫동안 [[비구니]]가 없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있었으나 대승 불교와는 달리 전승되던 중에 비구니계가 오래전에 유실되어 더 이상 비구니를 낼 수 없게 되었다. '다사 실 마타'(스리랑카), '띨라신'(미얀마), '매치'(태국)라고 하는 평신도 여자 수행자가 있어서 이들을 보고 '비구니'라고 착각할 수 있지만 이들은 비구니는 아니다. 본래 불교의 계율은 부처에게 계를 전해 받은 자가 적합한 형식을 갖추어 다시 후대에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법하게 계를 전수받은 자가 사라지거나, 적법한 형식을 갖출 수가 없게 된다면, 어떤 사람이 설령 계의 내용을 모두 안다고 해도 남에게 계를 줄 수가 없다. 그런데 상좌부 비구니 계맥이 전부 끊어져 버렸기 때문에 전세계 불교에 상좌부 전통에 따라 계속 이어진 비구니계가 전해지는 곳은 없다.[* 대승 불교에서도 계맥이 끊겼으나 이를 서상수계, 즉 계를 받기를 부처나 보살에게 간절히 요청해서 받았다고, 혹은 자서수계, 즉 자기가 자기에게 계를 주었다고 하면서 계맥을 존속케 한 사례가 있다. 조선시대의 불교계에서도 서상수계로 계맥을 시작한 사례가 있다. 이러한 서상수계나 자서수계는 대승 불교 전통에서는 용인됐지만 상좌부 불교에서는 불법적이며 무효라고 본다. 서상수계나 자서수계의 교학적 근거가 대승 경전에만 있는 것이라... 그래서 한국 불교계에서도 바로 이 계맥 문제는 내부적으로는 첨예한 논란의 대상이다.] 현대에 들어 대승으로부터 비구니 계맥을 받음으로서 비구니 상가를 복구하려는 노력이 있지만 대부분 인정받지 못했으나[* 이 때문에 현재의 동남아 상좌부 불교에서 여성 불자에 대한 차별은 현실적으로 있으며 동남아에서는 현세에 공덕을 쌓고 [[윤회]]하여 다음 생에 남자로 태어나 깨달음을 얻어야한다는 식의 희한한 얘기를 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서 [[https://www.youtube.com/watch?v=_ZSHNAiQomc&t=40m35s|법륜 스님 구글토크]]에서 [[외국인]]이 질문하고 [[법륜(승려)|법륜 스님]]이 답변한 것이 있다. 법륜 스님은 [[여성]]에 대한 차별은 불교가 봉건 문화를 받아들여서 발생한 것이고 원래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스리랑카]]에서는 1996년에 한국 [[조계종]]의 도움을 받아 스리랑카 교단이 비구니가 되고 싶어하는 여자 10명에게 수계를 하게 하고 교단에서 정식으로 인정하여 비구니 상가가 정착했다.[[https://books.google.co.kr/books?id=RoLIQEJHptMC&pg=PA99&lpg=&redir_esc=y#v=onepage&q&f=false|#]] 1998년에는 대만의 불교계로부터도 수계한 듯하고, 2000년대 후반 기준으로 스리랑카에만 비구니 500여 명이 있는 것 같다.[[http://www.congress-on-buddhist-women.org/71.0.html|#]] 이렇게 [[스리랑카]]에서 비구니 상가가 복구된 이후 [[태국]]에서도 스리랑카에서 비구니계를 받아와 비구니 상가를 복구하려는 노력이 있다. 1998년에 [[스리랑카]]에서 계를 받아온 최초의 비구니가 생긴 이래, 2019년 현재 태국엔 스리랑카에서 계를 받아온 비구니 285명과 태국 내에서 자체적으로 수계한 사미니 8백여 명이 존재한다. 그러나 태국은 여성수계금지법까지 만들며 여전히 태국내 비구니 수계를 막기 때문에 완전한 복구에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1967|#]] [[아잔 브람]]이 이끄는 [[호주]]의 테라와다 교단(Buddhist Society of Western Austraila)에도 정식 비구니 상가가 존재한다.[[https://bswa.org/location/dhammasara-monastery/|#]] 그러나 상좌부 비구니 승단 복구는 엄격한 율장의 눈으로 보면 사실 이미 불가능해진 지 오래이다. 상좌부 율장에 따라 어떤 여자가 비구니로 수계하려면, 먼저 적법하게 수계한 장로 비구니 5명이 입회해야 한다. 그런데 비구니 계맥이 끊어진 지 오래라 이제 와서 복구한다고 하는 판에, 어디서 적법하게 수계한 장로 비구니를 구한단 말인가? 또한 상좌부 율장에서는 비구니 수계자는 비구니 승단만이 아니라 비구 승단으로부터도 이중으로 계를 받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반드시 비구 승가가 협조해주어야만 한다. 따라서 엄격한 상좌부 율장의 기준으로 보면, 대승 비구니 계맥은 상좌부 율장의 유효성을 결여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무효이고, 이것을 받아 상좌부 비구니 승단을 복구하겠다는 것 역시 심각한 월권행위이다. 또한 동아시아 대승불교는 법장부의 사분율을 받아들여 승려들이 계체를 얻는다고 여긴다. 설령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계맥이 유효하다고 인정해도, 분별설부의 율장을 사용하는 현대 상좌부 불교의 관점에서는 그냥 받아들일 수가 없다. 심지어 같은 대승불교권인 티베트 불교는 상좌부나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계맥을 모두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티베트 불교가 근본설일체유부의 율장을 사용하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 내부로 사분율을 사용하는 동아시아 대승불교 비구니 계맥을 받은 비구니가 생기는 것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다. 태국 불교계가 비구니 승단 복구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분명히 율장적인 근거가 있다. [[밀교(불교)|밀교]] 수준은 아니지만 상좌부 불교에서도 빠릿따(paritta, 호신주護身呪)라 하여 위험이나 악령으로부터 몸을 지키고 고통을 해소하는 호신주를 사용한다.[* 사실 이런 풍조 자체는 석가모니 생전부터 존재하여, 아함경에 '바라문교의 주문을 사용하는 것은 축생도에 떨어지는 것이다'라 나올 정도로 주술을 금기시하던 석가모니 본인도 점차 선의의 주문은 인정하였고, 때문에 초기 불교 시대부터 이미 호신주가 사용되었다. 이런 풍조가 극대화된 케이스가 대승 불교 중 밀교다.] 이것이 나중에 대승 불교에서 [[다라니]], [[진언]]으로 발전한다. [[대승비불설]] 문서만 보면 상좌부 불교와 대승 불교가 서로 갈등이 많고 멀리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각보다 교류가 많다.''' ([[https://www.youtube.com/watch?v=FftnGZR-CH4|성지순례]], [[https://www.youtube.com/watch?v=Z8z-OWGWhEs|스리랑카 진신사리]]) 그러나 상좌부의 승려들은 대승 불교 승려들과 함께 포살할 수 없다거나, 대승의 의견에 동의하면 범계한 것으로 보는 등 선을 명확하게 긋는다. 또한 한국 승려들이 상좌부 불교계로 유학 갔을 때 몇몇 상좌부 승려들이 대승 불교 승려들의 법랍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은근히 경계하거나 무시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1973년 한국 조계종에서 조선시대 [[숭유억불]]로 인한 계맥 유효성 문제를 완전히 봉합하고자 태국 승려를 초빙해 합동수계식을 열어 당시 20여명 정도의 한국 승려가 계를 받았다.[* 일본은 한국 불교 시선으로 보면 지키는 계율보다 안 지키는 계율이 많아 논외고, 당시는 아직 냉전 시대였으므로 중국 대륙과 베트남도 논외고, 대만도 일본 불교나 민간신앙 영향이 짙었고, 스리랑카는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내전 중이었다. 남는 게 태국 밖에 없는 것.] 하지만 수계식 이후 '대승이 어찌 소승으로부터 계를 받겠는가!'하는 반발이 나와서 없던 일로 하고 지금처럼 합동수계식을 하기로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